무돌씨 목소리Ⅰ 무돌씨가 만난 강의국가폭력 5·18과 민주인권, 고문, 여성폭력:협동조합 시민의 꿈 박현숙 | 제3기 광주평생교육 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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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5·18과 민주인권, 고문 그리고 여성폭력
8번째 시간 구 광주교도소를 찾아서

광주광역시와 (재)광주평생교육진흥원에서는 민주․인권 교육의 대중화 및 확산을 통해 ’정의로운 광주’를 만들고 광주시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자 「민주․인권 시민대학 지원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중 2019년 광주광역시 하반기 민주․인권 시민대학 지원사업 단기과정 기관으로 선정된 협동조합 ‘시민의 꿈’에서는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광주의 오월 정신을 되새기는 시민교육 프로그램이 펼쳐졌습니다.

민주인권 관련 시민단체 회원과 활동가를 포함한 광주광역시민 20명을 대상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나타나는 주요 국가폭력과 민주인권 교육’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의 강의였지만 함께 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총 10회로 진행된 강의 중 8차시인 11월 16일에는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던 광주 5·18의 소녀 차명숙 씨가 함께했습니다.

국가폭력 5·18과 민주인권, 고문, 여성폭력의 피해까지 온몸으로 견뎌냈던 차명숙 씨는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폐소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5·18 가두방송을 했던 차 씨는 38년 만에 보안대, 광주교도소 고문 만행을 폭로한 인물입니다. 참고로 차명숙 씨는 계엄법 포고령 위반 등의 혐의로 군사 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81년 12월 임시 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518 사적지 구 광주교도소를 찾아가다

505보안대 개방 시간에 문제가 생겨 우리는 구 광주교도소 일대를 먼저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구 광주교도소 입구에 선 차 씨는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몇 번이고 울컥하며 대화를 중단했습니다. 꺼내고 싶지 않은 5·18 고문의 생생한 증언은 당사자가 생존하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퇴색될 것만 같다는 안타까움이 이어졌습니다.

5·18민주항쟁 사적지 구 광주교도소는 북구 각화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도소가 옮겨지면서 음침한 텅 빈 건물만 철거될 날만 애처롭게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광주교도소라는 역사현장의 방문을 통해 국가폭력의 잔인한 실태를 하나하나 들어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 난무했던 인권침해 실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도소를 돌아보는 내내 참여자들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5·18 피해자 차명숙 씨의 증언을 듣다

“광주교도소는 내 인생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하지만, 트라우마 속에서 빠져나오려면 정확하게 봐야지요. 그땐 제가 왜 끌려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제일 기억나는 것은 김일성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난 8항목에 걸려 잡혀갔는데 그중 하나가 간첩이라는 것입니다. 보안과에서는 누가 배후조종을 하고 있는지 찾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2차 고문은 정신적인 압박이었습니다. 3개월 조사받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차 씨는 팔목은 가죽으로 채워진 뒤 30일 동안 같은 동작으로 먹고 자고를 반복했습니다. 광주교도소에서는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서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이유로 스무 살 여자아이에게 혁시갑을 채웠습니다. 고통에 밥도 일주일 동안 먹을 수 없었습니다.

“말하고 싶지만, 기록이 없습니다. 말을 해도 다들 차명숙이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그러던 중 2008년에 대전 국가 기록원에 수감기록을 보고 한 달을 울었습니다. 용기를 내 광주에 부탁해 4월에 기자회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은 밥을 지어주며 나를 따듯하게 안아주었습니다”

교도소에서 하루 한 시간은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한 시간이 굉장히 소중했습니다. 매일 고문이 이어지니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어져 넋을 잃고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저의 눈동자가 이상하다고 할 때 그때부터 말이 없어졌습니다. ‘명숙이는 말이 없었다.’ 그때부터 교도소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배신, 눈초리, 어린 간첩을 잡았다고 축배를 들었던 교도관들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분들은 지금도 저에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습니다. 그 분노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일어서기 전까지 누구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이 땅에 나를 대변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전 지금도 그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당사자는 얼마나 힘든 세월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차 씨는 그때부터 사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수감 중 누군가가 저에게 퉁소를 불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마음으로 동생 같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침에 깨면 거미가 있었죠. 겨울을 지나면서 봄까지 거미는 저와 함께했어요. 저는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차명숙 씨의 기억은 계속되었습니다.
“이곳은 나에게 두려운 곳입니다. 사람들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스무 살 어린아이에게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곳이지요. 흔히 소름이 끼치면 근육이 굳는다고 하죠?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감정이 조절이 안 됩니다. 고문보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무서운 곳입니다. 그 상황을 묵인하고 방관했던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당시 피해자인 차 씨의 증언이 없었다면 국가폭력 5·18과 민주인권, 고문, 여성폭력의 피해는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서 잠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차 씨를 비롯해 5·18과 관련한 새로운 구술과 증언이 이어지고 있는 시기 ‘5·18 국가폭력의 지속적인 기록과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이 필요하다’라는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

우리는 교도소 내부 암매장했던 장소까지 둘러보았습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지나가는 시민 차량에 총을 발사해 8구의 시신이 초소 쪽문으로 들어왔지요.“

5·18 시신발굴작업을 하는 관계자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5·18 기념재단은 현재까지 구 광주교도소부지 내에서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민주, 인권, 평화의 도시 광주에 이렇게 아픈 과거가 있다는 걸 많은 분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5·18까지 나타나는 주요 국가폭력들 속에 5·18 희생자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장답사를 통해 국가폭력이 민주인권에 미친 영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의 민주인권평화 운동의 현장에서 피해를 보고도 아직도 숨죽이며 살고있는 이들이 용기 내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국가와 모든 국민이 해결해야 할 숙제니까요.

박현숙
제3기 광주평생교육 웹진 기자